TV드라마 인문학(23)-이서구(2) | |
내용 |
“구수한 입담 식(式) 역사이야기-
초기 TV사극작가의 전설로 남다” 작가 이서구는 1899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81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서울을 무대로 서울에서 살았다. 그래서 여러 군데서 그를 서울출생으로 적어놓은 곳이 많다. 하기야 서울이나 안양이나 거기서 거기지만 사실상 이서구의 이미지에는 서울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부분들이 없지 않았다. 예컨대 기생과 관련된 멋쟁이 이야기라든지, 모나지 않고 언제나 대세에 따라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그의 입을 통해 비교적 자주 언급되는 서울의 뒷골목이나 풍류나 옛날 서울의 세시풍속이라든지....좌우지간 그는 서울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22년에 신극 연구단체 ‘토월회’를 조직했고, ‘회한’ ‘참패자’ 등 다수의 소설과 수필과 시와 평론을 발표했으며, 방송에서는 숱한 라디오드라마로 사극의 디딤돌을 놓았고, TV드라마로는 역시 사극 ‘장희빈’과 조선조 철종 이야기인 ‘강화도령’과 ‘민며느리’ 등을 썼다. 조선연극문화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서울시 공보처장으로 공무원 생활도 잠시 했고,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한국방송문화협회 회장도 거쳤다. 그리고 한때 주요 일간신문의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니까 이서구는 팔방미인이다. 모든 문화분야의 초기에는 그가 관여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활동 보폭은 넓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이 신파극 ‘홍도야 우지마라’였다. 한때 이 신파극 한편이 전국을 휩쓸고도 남았다. 신파극 ‘홍도야 우지마라’ 이후, 기생을 무릎에 앉혀놓고 쓴다는 소문까지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그가 죽고 나서 얼마 뒤 그의 묘소에서 열린 묘비제막식에서까지 이 노래는 원(元) 가수 김영춘씨에 의해 불리어졌다. 그의 신파극은 해방 전부터 주로 서대문에 있는 동양극장(훗날 문화일보사 자리)에서 공연되었다. 공연 때마다 장안의 기생들이 단체로 몰려드는 바람에 이서구는 평소 기생치마폭에 쌓여서 지낸다거나, 글을 쓸 때는 아주 앳된 기생을 무릎에 앉혀놓고 쓴다든지 하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 그가 한창 방송사극을 쓸 때도 마치 누가 보기라도 한 것 마냥 이런 소문은 그치지 않고 떠돌았다. 정작 본인은 이런 말을 들어도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줄담배를 피웠다. 동양극장 시절, 이서구는 참으로 많은 무대극본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작품마다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당시 그는 서울 묵정동에 있는 일본인 유곽의 방을 하나 빌려 주로 거기서 극본을 썼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자기가 쓴 신파극 대본을 기생들에게 한번 읽어준 다음, 그들 가운데 가장 슬프게 울어주는 기생에게는 팁을 두둑하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원고를 밖에서 기다리는 사환에게 시켜 보냈는데, 그때 사환은 그 원고를 자전거에 싣고는 쏜살 같이 달려 동양극장으로 배달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작가행세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그는 동양극장 시절 누구도 누릴 수 없는 작가대접을 받은 셈이다. 궁중사극, 여성인물 중심 사극으로 TV사극의 한 장르를 열다 20대 때인 신문기자시절에는 일제총독부에 잠입해 그들의 회의내용을 취재해 특종 보도하는 사회부의 명기자이기도 했다. 그런 파란만장한 이서구가 라디오와 TV에서 사극을 쓴다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우려가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사극은 고증이 필요한 장르라 더욱 걱정스러웠지만 워낙 작가가 없을 때라 그나마 구수한 역사이야기를 해줄 수만 있다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뜻밖에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방송사극을 성공시켰다. 예의 그 구수함으로 마치 옛날이야기를 해주듯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사극을 써나갔다. 방송사극의 모태, 방송사극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은 방송사 복도 의자에 앉아 혼자 울고 있었다. 이걸 보고 놀란 후배작가 한 사람이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물었다. 그때 그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쓴 작품을 지금 녹화를 하고 있는데, 내가 들어도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남들은 웃었지만 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순수함 그 자체였고 그만큼 그는 감성적이었다. 결코 화내는 일 없이 늘 빙긋이 웃는 모습으로 남을 욕하거나 비난하는 적도 없고, 나름대로 가장 신사답게 민주적으로 살아가는 인상이었고, 그러면서도 마음은 한 없이 여린 사람이었다. 작가 이서구는 노년에 사진촬영을 낙으로 삼고 소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메라를 벗 삼아 서울 일대와 지방을 샅샅이 누비며 고적과 유적지를 주로 카메라에 담았다. 여전히 온후한 모습으로 늘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사람들은 그를 막연히 전설 비슷한 사극을 쓴 작가로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방송사극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그의 사극 가운데 몇몇은 시청자들에게 두고두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그 가운데 MBC-TV에서 방송한 사극 ‘장희빈’은 전국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불후의 인기드라마 가운데 하나로, 그 후로도 몇 번씩 방송사마다 다시 만들어 방송할 만큼 일찍이 TV사극의 단골소재를 발굴해낸 공로가 있다. 특히 궁중사극, 여성사극을 계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서구의 사극에는 거창하게 시대와 역사를 논하는 일종의 정치사극은 없다. 그 대신 여성과 궁중비사 중심의 정서를 전하려는 나름의 꿈이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 이야기에 치우친다는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의 한 장르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한 작가 이서구의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TV사극은 그를 밟고 이른바 ‘퓨전사극’ 또는 ‘판타지 사극’이라는 시대에까지 와 있다. |
---|---|
파일 |